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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시연이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무대 위에서였다.

무대. 왜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것도 초상화를 그리는 작자가 조용한 작업실 어딘가에 처박혀 얌전히 일이나 하지 않고 굳이 시끄러운 공연장의 플랫폼에 올라갔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그전에 이 시연이라는 자는 왜 한사코 가진 것 없는 척, 맨발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가. 또한 그러면서도 왜 최대한 이목을 끌도록 몸에 착 붙되 소매도 길이도 긴 샛분홍색 드레스를 의상팀에 주문하고, 헤어/메이크업팀에는 파마 풀린 긴 머리를 산발로 만들고 화장도 신라 시대 화랑만큼 기괴할 것을 요구하고, 조명팀에는 화려하고 어지러운 네온 빛줄기를 바랐는가.

의아함에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건 시대를 잘못 알아서다.

그래. 당신. 초상화가라면 모름지기 자기 작업실이든 클라이언트의 대저택이든 어딘가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예술 행위를 한 다음, 그것이 끝마쳐지면 완성품만 ‘짜잔!’ 하고 공개해야 한다고 여기는 당신. 아니면 심지어 공개의 순간조차 없고, 수백 년 전 메디치 가문을 연상시키는 후원자의 보호 아닌 보호 아래에서 우아하고도 안전하게 예술을 할 줄로만 아는 당신. 말하자면 완성품, 그리고 극도로 소수인 계층의 이타주의를 통하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는 수익을 창출할 수 없다고 믿는 당신.

그런 시대는 애저녁에 저물었다.



초상(肖像)계에서는 그 구시대의 초상(初喪)을 알린 작가가 시연이었다. 처음에는 뮤지션이 작곡 과정을 공개하고, 배우는 #bts를 태그하고, 특히나 시연과 같은 일을 하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작업 과정 영상을 올리길래 ‘나도 한 번?’ 싶어서 그랬다.

잃을 것이 없었다. 당시 시연은 다섯 명의 다른 작가와 함께 작업실 겸 수면실 겸 거실 겸 부엌 겸…… 그야말로 화장실 빼고는 모두 ‘겸’인 거주 형태를 공유하고 있었는데, 낮이 언제 시작하고 밤은 언제 끝나는지, 만약 밤이 시작하고 있다면 그에 걸맞는 고요함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어제 점심에 최초로 끓였으나 그날 저녁에 재탕됐으며, 오늘 아침에 또 한 번 재탕된 된장찌개 냄새는 언제 없어질 건지,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알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일러스트레이터가 화가와 같은 작업을 한다고 하면 얼굴이 시뻘게지며 제 인생 최대의 모욕인 양 반응하는 다섯 하우스메이트들이었다. 많은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월급이 쥐꼬리만 하다면 시연은 물론이고 이 다섯 작가들의 월급은 쥐꼬리를 수억 개로 잘라 믹서기에 갈아 가루로 만들어, 그 가루가 세상을 수백 년 떠돌아 닳고 닳아 없어지기 직전까지 간 상태보다도 적었다.

돈이 아무리 다가 아니라지만, 돈 없는 게 자랑은 아니라고 시연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과 계속 같이 산다면,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세뇌될 것만 같다는 공포에 떨었다.

그리고, 참. 굳이 다른 직종이 아니라 배우가 #bts를 태그한다고 한 것은, 시연의 이 시절이 bts가 방탄소년단이 아니라 behind the scenes를 의미할 정도로 오래전이었음을 뜻한다.

심지어 방탄소년단 중 몇 명은 그 당시 태어나긴 했었나? 그렇게까지 어리진 않은가? 미성년자는 아니잖아. BTS도 활동한 지 한참 됐잖아. 시연은 다른 젝키와 핑클의 팬들, 그러니까 그 나름 아직은 ‘요즘 세대’라고 대강 퉁쳐지는 사람들과 사춘기를 보내지 않았는가? 시연이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에 다닌 세대의 끝자락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니…… 근데 설마 진짜 미성년자인가?

시연은 궁금했으나 검색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런 건 모르는 편이 나았다. 아무튼 시연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이가 많다.



처음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어 올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남들이 하는 것처럼 캔버스도 좀 나오게, 자신도 좀 나오게 구도를 잡고 ‘녹화’를 눌렀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영상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도, ‘인플루언서’가 된다는 것도 상상을 못 하던 때였다. 시연조차 그랬다. 그래서 부담이 없었다. 그저 반쯤은 관심에 목말라서, 반쯤은 뭐라도 세상에 내놓는 용감한 사람들이 멋져 보여서 올렸다. 하지만 업로드 스케줄? 그런 게 뭔지도 몰랐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영상이 올라가고 며칠 후, 문제라면 문제고 축복이라면 축복일, 시연은 생각지도 못한 요소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시연 본인이었다.



정치인이 아름다우면 지지율이 올라가고, 범죄자가 아름다우면 무죄를 선언해야 한다며 팬클럽이 생긴다. 미친 시대다.

그 미친 시대에 가난했던 초상화가 하나가 댓글을 훑어보고는, 프레임 안에서 가장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요소가 자기 그림이 아니라 자신임을 깨달았다고 나무랄 수 있는 자가 있을까. 있다면 필시, 누군가가 무언가를 시작했을 때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도록 관심이 없는지를 눈곱만큼도 모르는 인간들이겠지. 이는 비단 ‘예술’의 경우에만 그런 게 아닌데도 말이다.

세계 ‘최고’ 의대에 들어가면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줄 것 같은가?

결혼을 어마무시하게 ‘잘’하면?

돈을 ‘억’ 소리 나게 벌면?

지나가다 알아볼 순 있을 것이다. 네트워킹 이벤트며 동창회 같은 데서. 하지만 진짜 관심, 진짜 애정, 존경, 심지어 존재의 인정 같은 걸 원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이는 매우 잔인하지만 또한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저절로 보장하는 아름다운 현상이다. 하지만 당시 시연은 이를 아름답게 여길 겨를이 없었다. 자유를 갈망할 정도로 구속되어 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고마웠다.

제발 사람들이 지들 욕구를 시연에게 투영하는 게 아니라, 시연 본인을, 그게 아니라면 제발 초상화 자체라도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의식적으로 깨닫게 된 건 한참 나중이었다.

무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음을 깨달았을 즈음.



—#—#—#—#—#—



이백 명이 들어가는 공연장이었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쿵. 쿵. 쿵. 일정한 리듬이 박동 쳤다. 장르의 정확한 이름은 몰랐다. 여하튼 시연은 ‘가사가 없되 비트가 일정해서 전쟁에 나가는 느낌이 나는 음악’을 주문했고, 음향팀이 가져온 곡 중 하나가 이것이었으며, 따라서 이것을 골랐을 뿐이었다.

시연이 서 있는 무대 아래로는 검정의 파도가 물결쳤다. 드레스코드 때문이었다. 현실적 이유는 관객들이 갖가지 색의 옷을 입으면 카메라에 담기는 그림이 예쁘지 않아서였고, 시연이 자기 브랜드에 맞게 승화시킨 이유는 ‘타인이 순간에 녹아듦에 해가 되지 않도록 서로 배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나저러나 효과는 완벽했다. 움직이는 검정 물결 위로 보라와 파랑의 네온 조명이 춤추었고, 시연만 샛분홍색이었다.

누가 주인공인지는 영상이란 매체를 처음 접한 갓난아기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시연 앞에 거대한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는 것쯤이야 무시할 수 있었다. 걔들은 나무였고 천이었고 바랜 갈색이었고 흰색이었다. 번쩍이는 조명의 향연과 현대 기술에 힘입어 몇 시간 만에 세워지고 몇 시간 만에 또 허물어지는 무대, 그리고 관객석에 둘러싸여 있으니, 수백 년 역사를 견뎌온 캔버스와 이젤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구식 물체들 건너편에 서 있는 남자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른 어딘가에서라면 참으로 아무것이었을, 누가 봐도 잘생긴 자였다. 그 잘생김을 모두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보도록 하려고 의상팀은 그에게 검은 천을 입힌 상태였다.

말이 좀 이상한데, 그야말로 천 쪼가리를 넝마처럼 둘렀단 뜻이다. 그리고 그 천은 촘촘하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듬성듬성한 건 아니었고, 시스루. 그래, 시스루였다.

완전한 노림수였다. 인간이란 제아무리 심심한 범인(凡人)이라도 상상의 동물이라서, 다 벗은 것보다는 가린 척한 게 자극적이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모든 형태의 인기가 어떻게든 결국 성적 매력으로 귀결된다는 건 이 업계에서도, 저 업계에서도, 업계라고 불릴 만한 것들에서는 전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상 애인의 역할을 하는 인플루언서가 다른 인플루언서를 만나면 어떻게 된다? 인플루언스의 폭발이 일어난다. 모두가 바라는 바다. (아, 그게 요즘 시연의 타이틀이었다. 초상화가가 아니라, 인플루언서.)

이 남자는 팔로워가 많았고, 스캔들도 많았으며, 광고도 찍었고, 자기 이름을 단 헬스클럽 체인이 있었다나, 뭐라나…… 아니, 그건 이 사람 이전 사람이었었나…… 이재원인지 이제원인지 이재훈인지,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이전에 이재원과도 이런 공연을 하고, 이제원하고도, 이재훈하고도 했을 테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관객이 무대로 올라와서 자기소개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다 보면 그 모든 이름들이 뒤섞여 흐릿해졌다.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래서 시연은 그리게 될 자의 얼굴을 그리는 순간 전까지는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것도 아닌데 사람 얼굴을 뜯어보는 데 습관이 들다 보면, 노동을 주체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더 큰 문제는, 같은 얼굴을 계속 보다 보면 얼굴 아닌 것들이 섞인다는 점이다. ‘얼굴 아닌 것’이라 함은, 시연이 생각하는 그 사람의 배경, 시연이 생각하는 그 사람의 성격, 취향, 꿈 등을 뜻했다.

‘시연이 생각하는’이 키포인트였다. 사실일 필요는 없으나 사실로 여겨지는 것.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섞이게 되면 마치 지방이 과하게 낀 내장 같은 초상화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쉴 때는 쉬어야 한다. 암……



아니 사실, 솔직해지자면, 시연은 원래 사람 얼굴에 너무 관심이 많았다. 자꾸 쳐다보다가 처맞을 뻔한 적이 몇 번 있게 되면, 그 이후에는 이렇게 무슨 가짜 이유를 들어서라도 필요하지 않을 때면 쳐다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시연!”



인이어로 들려오는 민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시연은 움찔했다.



“미쳤어? 움찔하기는.”



그렇다. 나의 행동과는 별개로 누가 자꾸만 인이어로 이래라저래라하는 데에 익숙해지다 보면, 뭐라 지껄이든 흘려듣는 척하면서도 다 알아듣는 내공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시연은 무대 위에서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한 것이다.

물론 관객들은 이 정도 실수는 실수라고 눈치채지도 못했다. 전쟁 행진곡 같은 음악 때문에 사람들의 눈은 열망에 가득 차 빛나고 있었다. 그게 네온 조명이 그들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뚜렷이 보였다. 땀도 흘리고 있었다. 공연장이란 아무리 냉방을 해도 결국 더워지게 되었다.

이 순간 이전까지는 모든 게 괜찮았다. 시연은 의식을 준비하는 고대 사제처럼 물감을 가져오고, 섞고, 그야말로 쇼를 했다.



쇼걸. 어떤 사람들은 시연을 그렇게 불렀다. 처음엔 기분 나빴는데 이제는 상관없었다. 아니, 상관없다고 여기려고 노력했다. 그런 말을 쓰는 작자들은 마치 지들이 지들 돈으로 시연의 작품 내지는 시연 자체를 샀다는 뉘앙스를 풍기느라 그런 단어를 쓰는 모양이었는데, 실제로는 시연의 수입에 그놈들 돈은 아마 한 푼도 섞이지 않았을 터였다. 원래 그런 놈들은 예술에 돈을 쓰지 않았다. 해적판을 보거나, 어디서 공짜로 무슨 영상을 보고 본인을 퍽이나 고풍스러운 취향을 지니신 딜레탕트라고 자위하겠지.

더 중요한 건, 그런 놈들의 전 재산을 아무리 모아봤자 결과적으로 시연이 자신을 팔게 된 액수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수억 명이 시연을 바라보았다. 그 수억이 1천 원, 1불, 1유로씩 기여해서 만들어진 게 시연이었다. 세상은 넓었고 인터넷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했다. 무한함 속 수억 명의 소위 ‘푼돈’은 머저리 고풍충들의 값싼 비판을 상대로 매번 이겼다.

‘늙은 쇼걸’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더 웃겼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늙었다는 말을 마치 욕처럼 쓰는 작자들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자기네가 발전이 없는 걸 그런 식으로 변명하는 걸까?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십 년이 지났으면 발전이라는 걸 할 법도 한데 그걸 못하니, 마치 늙은이들은 전부 다 끝났다는 식으로 얘기하며 역시 또 자위하는 거야.



“너 뭐 하니? 실실거리면서.”

민진이 또 말했다.



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이랬다. 시연은 본인이 꽤 날카롭다고 생각했는데, 민진은 더 그랬다. 그래서 민진이 옆에 있으면 시연은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민진이 알아서 다 화내주니까.

뭔가 문제가 생긴다면 민진이 가장 먼저 알아채 줄 것이고, 대부분 경우에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시연이 눈치채기도 전에 해결까지 해줄 터였다. 그러면 시연이 감내해야 할 것은 그저 민진의 투덜거림 뿐이었다. 그 확실함만큼 마음 놓이는 게 또 없었다.



“그려야지. 음악 다 지나가.”



음악은 스케줄과 같았다. 음표와 쉼표는 정해진 때에 나타났다가 다음 차례를 위해 잽싸게 사라졌다. 도돌이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반복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다른 선율이 설 자리가 없었고, 반복이 끝나면 그 구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영영 돌아오지 않아.

영영.

캔버스 건너편으로 남자가 보였다. 그 사람은 어색하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웃었을 것처럼 보였다. 대개들 그렇다. 무안하니까 웃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연이 늙은 쇼걸에 관해 생각하면서 실실 웃은 데에다 이 사람까지 웃기 시작하면 관객들이 의아할 테니, 역할에 충실하느라 표정이 굳은 것이었다.

뭐랄까, 역할이라 함은, 그러니까 제물.



시연은 붓을 집어 들었다. 더 자세히 뜯어보기 전에 그래야만 했다. 그저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가장 좋았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시연이 섞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분석하고 계획하는 건 다른 직업을 가진 자들의 몫이지, 시연의 일이 아니었다.

끝을 둥글린 거대한 납작붓이었다. 손잡이가 두꺼웠다. 무기 같았다. 화가가 전쟁에 나간다면 모름지기 이런 걸 들고 가야지. 초반 시선 제압에 그만이라……

그런데 왜 제압하기는커녕 제압되지?

붓이 무거웠다. 천근만근이었다. 오버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손에 들렸던 그것이 시연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올곧게 서 있어야 할 사제는 그렇게 무릎을 꿇었다. 넘어지면서 물감이 들린 여러 크기의 접시에 손을 지지하는 바람에 갖가지 색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객이 환호했다. 공연 스토리텔링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너 괜찮아?”

민진이 물었다.

“안 괜찮으면 붓을 휘휘 저어 봐.”



아주 그냥 당근을 흔들어달라고 하지 그러냐.



“혹시 무슨 마비 증세가 온 거야? 그럼 그냥 드러누워 봐. 그럴 수 있어? 그러기라도 해야 조명을 꺼서 드라마틱하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수 있어.”



민진의 이런 점도 시연은 참 고마웠다. 마비 증세의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드라마틱하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를 바라다니. 시연에게 ‘뭣이 중한지’를 아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붓을 흔들 수도, 드러누울 수도 없었다. 마비 증세가 맞는 것 같았다. 캔버스 건너편 남자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자기가 뭔가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인공호흡? 하다못해 무대 아래 스태프들이 준비해 놓은 물이라도 가져다줘야 하나?



갑자기 유명해졌다고 해서 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잘생겼다고 해서 다 얕은 인간도 아니었다. 당연한 건데도 가끔 까먹는다.

게다가 이 사람은 이런 공연이 처음. 반면 시연은 수백 번도 더 했다. 당연히 시연이 이끌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이끌기는커녕, 시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이 사람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전혀 낭만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공포스러운 의미에서. 검은 시스루 천으로 가려서 일부러 더 도발적이게끔 만든 그 몸 전체가 아무 형체도 없는 것처럼 일렁였다.

네온 조명 때문은 아니었다.

쿵. 쿵. 쿵. 일정한 음표와 쉼표의 스케줄 때문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화 물감의 냄새가 오늘 특별히 더 숨 막혀서도 아니었다.



눈 때문인가? 시연의 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갑자기 실명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설마 뇌졸중 같은 것의 전조 증상인가?

아니, 그런 건 전부 말이 안 됐다. 저 부분의 공기만 어떻게 된 거였다.

왜냐하면, 검은 관객석의 물결은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조명이 뿜어져 나오는 전구들조차도, 똑바로 쳐다보면 눈이 아프기는 하지만 그래도 보였으니까.

그저 저 사람만. 지금 그려야만 이 공연에 관련된 계약을 이행한 것이 되는, 저 사람만 불분명하게 흩어졌으니까.



<네가 나를 불렀어.>



여자가 한 말이었지만, 민진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 여자는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려는 것을 겨우 참는 것 같았다. 그 웃음기가 시끄러운 음악 소리 너머로도 느껴졌다. 소름이 끼쳤다.

특히나 목소리가 나이로 보나, 톤으로 보나, 시연과 너무 흡사하다는 점이 무서웠다.



틀림없었다. 시연의 목소리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또랑또랑해서, 낭독 대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목소리가 크다는 게 아니라, 작게 말하는 듯해도 멀리까지 나간다는 뜻이었다.

그런 대회는 늘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니라, 흔한 담임의 흔한 욕심을 채우려는 작전에 휘말려서 나간 거였다. 그런 데서 읽으라고 시킴당한 글은 언제나 머저리 같은 사상을 담고 있었다. (어려서 그렇게 여겼던 게 아니다. 커서 돌이켜 보니 더욱 머저리 같았다.)

그런 걸 읽고 있을 때면 시연은 자신이 목소리를 내기만 하는 장치이며, 따라서 혼은 다른 어딘가에 있다는 상상을 했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짓보다 확실히 더 생산적인 낮잠을 자고 있다든지.

학교 뒷골목에 있는, 최고로 맛있었던 떡볶이 노점에서 ‘많이 담아주세요!’를 외치고 있다든지.

청중 중 저 멀리 맨 뒷줄에서 딴짓하는—그럼으로써 열심히 듣고 있는 자들보다 낭독의 머저리 같은 내용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있는—1학년생들 사이에서 키득거리고 있다든지.

그렇게 해야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잘 알았다. 자기 목소리가 자기가 아닌 다른 데서 나오는 기분.



이 여자는 시연과 말투만이 달랐다. 내용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영광으로 알아라. 나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내가 나타나는 건 아니야. 그래서야 영원한 존재인 나조차도 시간이 없게 될 거거든. 인간들이란 원하는 게 참 너무나도 많아. 줘도 줘도 또 원해. 그래서 줘버릇하면 안 돼. 버릇을 잘 들여야지.>



이건 또 뭔 소리래.



<하지만 너는 자격이 있어. 너는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을 나를 불렀어.>



그런 적 없다.



<너는 몰랐겠지만, 네가 지금껏 부른 건 나였어.>



그럴 리가 없다. 지금 이 상황이 그 결과라면 더욱더.



<이건 벌이 아니라 축복이야.>

“근데 왜 그림을 못 그리게 해!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자기도 모르게 나와버린 말이었다.

시연은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웬걸. 관객은 여전히 열광했고, 캔버스 건너편 남자는 여전히 고민하는 눈치였으며, 조명은 돌아갔고 음악은 쿵쿵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거였다. 갑자기 방금 한 말이 실제로 ‘한 말’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입술을 움직이긴 했었나? 그저 생각만 한 건가?

하지만 미스터리 목소리가 시연의 생각을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혹은, 읽는다고 하더라도 전부 아는 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시연이 ‘발사’하는 말에만 반응하는 것 같았다.



<흐흐흐. 그럴 줄 알고 내가 약간의 트릭을 써 놨지. 네 이런 반응을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말이야. 하지만 늘 그럴 거라고 기대하진 마. 인간 세계에도 자기네만의 룰이 있지. 나조차도 그걸 매번 무시할 순 없는 거라고. 그건 상도덕이 아니야.>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소름 끼치는 목소리는?

시연이 이십 년에 걸쳐 자기를 불렀다고? 시연에게는 자격이 있다고? 벌이 아니라 축복이라고?



<못 그리게 하는 게 아니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지. 그저 결정의 순간이 온 거야. 저자를 내게 바칠지, 그러지 않을지.>

“무슨……”

<일단 선물을 줄게. 난 자비롭거든.>



순간 묵직한 무언가가 드레스 안쪽 주머니에 느껴졌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연결되는 바로 그 부분에 달린 주머니였다. 곡선에 적당히 숨겨져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의상팀에 특별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무대에 핸드백을 들고 올 것도 아닌데, 이런 주머니라도 없으면 뭐 아무것도 갖고 다닐 수가 없으니까. ‘신분증 정도는 반드시 자기 것을 자기가 갖고 다닌다’가 시연의 신조였다. 만약 공연 중에 전쟁이 났는데 신분증조차 없다면 곤란할 것이다.

시연도 알았다. 미친 생각인 거.

아무튼 그 특별한 주머니에 공연 전에 넣지 않은 뭔가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가.

동시에, 마비되었던 시연의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주머니 속 물체의 무거움이 갑자기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감 접시에 지지했던 두 손이 미끄러지자 시연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캔버스 건너편남이 작게 ‘헉’ 소리를 냈다. 관객은 크게 ‘앗’ 했다.



“끈다.”

민진이 말했다.

무대 조명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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